2025 남산골 하우스뮤지엄 <집.zip>전이 남산골한옥마을 이승업 가옥에서 열리며,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따뜻한 미감을 섬세하게 보여줬다. 기와 아래 스미는 빛과 바람, 조각보와 손바느질, 차향과 공예가 어우러져 ‘집’의 본질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무료 관람과 감귤잎차 시음회, 연장 운영 등 알찬 프로그램으로 가을 서울의 문화 일정을 한층 풍성하게 채웠다.
남산골한옥마을, 빛으로 펼쳐진 조각의 시간
남산 아래 한옥의 골목길을 따라 들어서면 일상의 속도가 잔잔하게 늦춰지고, 이승업 가옥의 대문을 넘는 순간 공기부터 달라진다. 고즈넉한 기와선은 햇살을 길잡이 삼아 처마 끝에서 반짝이고, 대청마루 위로 들어선 빛은 포근한 그림자로 바닥을 덮는다. 이곳에서 ‘2025 남산골 하우스뮤지엄 <집.zip>’전은 흩어진 시간을 모아 한 장의 이야기로 엮어내듯, 천천히 감각을 깨우는 방식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는 “흩어진 조각을 모아 하나로 완성한다”는 메시지를 중심에 두고, 나무와 돌, 흙이 얽혀 집을 이루는 원리를 천과 실, 바느질의 리듬으로 번역해낸다. 빛과 그림자, 직물과 바람, 오래된 창호와 현대적 감수성이 서로 기대며 새로운 호흡을 만들어낸다.마루에 걸린 천 작품들은 반투명한 결로 흔들리며 시간의 결을 드러낸다. 창호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빛은 조각보의 선과 면을 따라 흐르고, 그 순간 전시는 ‘보는 것’을 넘어 ‘느끼는 것’으로 변모한다. 은은한 직물의 결이 전해주는 온기, 발걸음에 맞춘 장지문 소리, 마당의 바람 냄새까지, 모든 감각이 집합해 ‘집’이라는 상징을 총체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특히 한옥의 구조와 전시물이 조화롭게 맞물리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안채와 사랑채로 이어지는 동선은 거주와 환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를 유연하게 오가게 하고, 각 공간에 배치된 작품은 그 경계의 의미를 섬세하게 되묻는다. 한옥이 지닌 여백의 미는 작품을 돋보이게 만들며, 관람객의 움직임과 함께 장면이 매 순간 갱신된다.
결국 이 전시는 박물관의 문턱을 낮추고, ‘살아 있는 집’의 호흡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다시 찾게 한다. 남산골한옥마을이라는 장소성은 전시의 메시지를 더 짙게 만든다. 장소와 예술이 서로에게 스며들 때, 관람은 보고 지나가는 행위가 아니라 머무르고 되새기는 시간으로 확장된다. 이곳에서 집은 단지 구조물이 아닌, 기억과 관계와 노동이 켜켜이 쌓인 문화적 총합임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말하고 있다.
천천히 걷고, 오래 바라보고, 깊이 들이마실수록 이 전시의 결은 더 따뜻해진다. 전통이라는 단어가 낡음이 아니라 삶의 방식임을, 한옥과 직물, 손끝의 기술이 오늘의 감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남산골한옥마을은 설득력 있게 증명한다.
온바이소이 조각보가 말하는 ‘모으고 잇다’
브랜드 ‘온바이소이(Onn. by Soi)’의 대형 조각보 앞에서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진다. 이승업 가옥의 창틀 치수에 맞춰 새로 제작된 특대형 작품과 곡선형 조각보 신작은 전통 원단의 질감 속에 현대적 온기를 품었다. 투명과 반투명 사이를 오가는 직물은 빛의 세기에 따라 색감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겹치고 맞닿은 봉제선은 서사적 리듬을 만든다. 그 변화무쌍한 표정은 오래된 이야기책을 한 장씩 넘기는 감흥과 닿아 있으며, 조각 하나하나가 각자의 생애와 시간을 품고 다시 태어났음을 조용히 증언한다.조각보는 역사적으로 절약과 지혜, 연결의 미학을 상징한다. 낡거나 남은 천을 그냥 두지 않고 모아 이어 새 용도로 환생시키는 태도, 바로 그 ‘모으고 잇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 된다. 온바이소이는 이 정신을 단지 재현하는 데 멈추지 않고, 한옥 공간의 구조적 곡선과 빛의 흐름을 작품에 반영해 동시대적 감각으로 확장한다. 큰 면과 작은 면, 직선과 곡선이 공존하는 화면은 보는 위치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구도를 제공한다.
봉제의 결은 가까이서 볼수록 설득력이 높아진다. 한 땀 한 땀 이어진 선 사이로 손의 온도가 스며 있고, 바늘땀의 간격과 방향은 화면의 호흡을 조절한다. 마루 위에 걸린 작품은 바람과 함께 미세하게 흔들려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체감하게 하고, 창호에 기대 선 조각보는 내부와 외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부드럽게 매개한다.
이러한 조형 언어는 집의 의미를 새롭게 사유하게 만든다. 흩어진 파편을 모아 하나의 전체로 완성하는 과정은 공동체가 서로의 틈을 메우며 삶을 지탱해온 방식과 닮아 있다. 조각보를 보는 일은 결국 ‘우리’라는 직물을 다시 짜는 일에 대한 은유다.
온바이소이의 작업 앞에서 관람자는 작품과 공간, 빛과 시간의 상호작용 속에 서 있게 된다. 시선이 머무는 동안 화면은 계속 변주되고, 감각은 풍부해진다. 그 변주는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지속적이다. 한옥의 질서와 직물의 호흡이 조우하는 이 장면에서, 전시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방식으로 질문한다. 당신의 집은 무엇을 모아 어떤 온기로 이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오늘, 무엇을 잇고 있는가.
규방의 집념과 감귤잎차 시음회가 남긴 여운
공예작가 최성미의 공간으로 들어서면 분위기는 한층 더 부드럽고 단단해진다. 복주머니, 버선, 모시함 등 작은 오브제들은 화려한 장식 대신 절제된 선과 안정된 비례로 말을 건다. 규방이라는 공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의 작업에는 여성들의 손기술이 품은 인내와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으며, 손바느질의 미세한 리듬은 마음을 조용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힌다. 바늘과 실이 그어낸 선들은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의 삶, 돌봄과 노동, 나눔의 기억을 잇고, 그 집념은 오브제를 넘어 일상의 윤리를 상기시킨다.이 전시의 묘미는 체험으로 이어질 때 더욱 선명해진다. 입동을 전후한 11월 7일부터 15일까지 매주 금·토요일 이승업 가옥 마당에서 열리는 ‘감귤잎차 시음회’는 차향으로 전통의 온기를 전한다.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 머금을 때, 나무와 흙, 섬유와 바람으로 이루어진 전시의 요소들이 감각의 회로에서 하나로 묶인다. 냄새와 맛이 기억을 오래 붙잡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관람 정보도 알차다. 무료 관람으로 부담 없이 들를 수 있고, ‘서울 문화의 밤’ 기간에는 금요일 21시까지 여유롭게 머물 수 있다. 전시가 열리는 공간은 안채와 사랑채 두 동선으로 나뉘어 있어, 각각의 성격에 맞춘 작품 배치를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더 나아가 남산골한옥마을 곳곳, 옥인동 가옥·윤씨 가옥·전통공예관·천우각 무대 등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상시 진행되어 하루 일정으로 충분히 풍성한 문화 체험이 가능하다.
방문을 계획한다면 아래 정보가 유용하다.
- 기간: 10월 14일~11월 23일
- 장소: 서울시 중구 퇴계로34길 28, 남산골한옥마을 이승업 가옥(안채·사랑채)
- 관람: 화~일 09:00~20:00, 월요일 휴관, 금요일은 ‘서울 문화의 밤’ 주간 21:00까지 운영
- 관람료: 무료
이 정보만으로도 가을의 한때를 차분하게 채울 동선이 완성된다. 전시장 안팎을 천천히 산책하듯 걸으며, 눈과 손끝, 후각과 미각이 함께 기억하는 예술을 경험해보길 권한다. 체험과 전시, 산책과 휴식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이곳에서, ‘집’은 전시의 주제이자 우리가 돌아갈 마음의 주소가 된다. 결론 남산골한옥마을에서 펼쳐지는 2025 남산골 하우스뮤지엄 <집.zip>전은 한옥의 여백과 직물의 호흡, 손바느질의 집념과 차향의 온기를 한데 묶어 ‘집’의 본질을 다감하게 보여준다. 온바이소이의 대형 조각보는 “모으고 잇는” 정신을 현대적으로 갱신했고, 최성미의 규방 오브제는 삶의 결을 한 땀 한 땀 되살려냈다. 감각을 열어두고 천천히 걷는다면, 전시는 보고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라 오래 머무는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이제 할 일은 간단하다. 전시 기간과 운영 시간을 확인한 뒤, 가벼운 겉옷과 여유로운 마음으로 남산골한옥마을을 찾자. 현장에서 감귤잎차 시음회와 연계 프로그램을 함께 즐기고, 옥인동 가옥·윤씨 가옥·전통공예관·천우각 무대까지 동선을 넓혀 하루를 채워보자. 관람 후기와 사진을 기록해두면 가을의 따뜻한 장면이 오래도록 저장된다. 집.zip이 건넨 온기를 일상의 폴더에 차곡차곡 저장해, 내일의 삶을 한층 포근하게 압축해보길 바란다.

